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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생활

러시아인들의 산책

Jeongwon Seo 2024. 11. 12. 11:12

제가 러시아에 살 때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러시아인들의 '산책력'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러시아에 살게 되면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러시아인들의 산책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러시아에서의 일상을 논할 때산책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의 산책은 많은 것을 포함하는데요. 문자 그대로의 산책뿐만 아니라, 남녀 사이의 데이트, 가끔은 집에서 편히 쉬는 것, 심지어 수업을 빼먹고 놀러가는 땡땡이도산책이라는 단어에 포함이 됩니다. 그러니 러시아에서 가볍게산책갈래?’라는 말을 들었다면 문맥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여 이해를 해야 합니다. 보통은 문자 그대로의 산책을 의미하지만 러시아인과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면 반드시 지참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체력입니다. 산책을 굉장히 오랜 시간하기 때문이죠. 저는 나름의 건장한 성인 남성으로 군생활도 조금 했고,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체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웬만한 러시아인의산책력에는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별거 아닌 산책에도 뒤쳐지는 걸 보니 각 운동에 맞는 필요한 근육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습니다만 핑계지요. 제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것이 더욱 빠른 이해를 도울 수 있겠네요.

 

모스크바에는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 중 하나가 원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원광학교였습니다. vk(러시아의 페이스북/인스타그램)라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원광학교 관련 그룹이 있는데 여기에 한국에서 왔는데 러시아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글을 올리면 종종 연락이 왔어요. 제게도 연락이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가까운 공원에 산책을 나가자고 하더군요. 잠깐이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약속을 잡고 가벼운 마음으로 승리공원이라는 곳으로 갔는데요. 승리공원을 지도로 한 번이라도 확인하고 갔다면 적어도 마음에 준비라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승기념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승리공원(영어로는 Victory Park)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모스크바에 만들어진 (대략) 폭은 약 700m에 길이는 1.4km 정도의 공원이에요. 공원 바로 옆 지하철 역에서 처음 보는 친구를 만나 어색하게 인사를 하곤산책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묻자 친구는 아무 방향이나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된다고 하더군요. 뭔가 싸한 느낌이 지나갔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어요. 다행히 러시아 친구는 이미 한국어를 배운 지가 조금 되어서 능숙하게 잘하여 내가 떠듬떠듬 러시아어를 할 때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기웃하며 한 시간가량 걸었을까 공원의 중심부에 있는 전승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만 집에 가고 싶은 상태였지만 친구에게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점잖게 물어봤습니다. 들려온 대답은 처음 만나서 물어봤을 때 들었던 대답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아무 방향이나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돼’

 

그때서야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이제 슬슬 집에 들어가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정중히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친구에게 나쁜 마음은 없었지만 또 한 번 산책을 가는 게 어떠냐는 친구의 말에 몸이 안 좋다는 말을 했더니 금세 연락이 뜸해졌습니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 한 번의 충격이 상당히 커서 그런지 이후에도 러시아인이 산책을 하자고 하면 거절할 수 있는 경우 산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러시아인으로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정중히 사양을 했던 경험이 있네요. 그리고 혹시나 산책을 어쩔 수 없이 해야할 경우에는 장소를 모스크바 중심부 쪽으로 잡았습니다. 모스크바는 중심부에는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마다 지하철역이 있기에 체력이 간당간당 할 때 탈출에 굉장히 용이했고 지하철역 근처에는 공원과 달리 볼 것들도 많고 커피샵, 디저트 가게 등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거든요. 

 

러시아인들이 왜 이렇게 산책에 환장하는지 제 나름의 결론을 말씀드릴게요. 날씨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러시아는 날씨가 대체로 안 좋거든요. 영국의 날씨도 안좋기로 유명하지만 모스크바도 이와 비슷해요. 그래서 그런지 해가 잘 비치는 날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여러 공원에 나와있어요. 그리고 모스크바 대부분의 공원은 여러모로 잘 정비되어 있기도 하고요. 공원에 가면 할 거리도 많고 볼 거리도 많아요. 몇몇 공원들은 모스크바강을 끼고 있어 한가로움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기에 러시아 사람들을 야외로 불러내기 충분하죠또 다른 이유로는 러시아 사람들의 금전적 생활 수준이 여유롭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돼요.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게 많지 않은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제일 값싸고 건강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내 추측이 틀린 것일수도 있죠. 하지만 볕 좋은 날 대부분의 공원에 빽빽하게 모여있는 러시아인들은 쉽게 보실 수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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