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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경험/경험

교정, 여기 그리고 지금 (공모전)

Jeongwon Seo 2023. 10. 31. 04:37

아래는 제가 제출한 공모전(한국학교 경험) 글 입니다. 재밋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두 아이의 아빠, 박사과정 중인 학생, 그리고 퍼듀한인장로교회의 한국학교 선생님이다. 2022년 여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한국학교 선생님이 모자라니 관심 있는 성도들의 지원을 독려했다. 그렇게 그 해 가을부터 아내와 함께 한국학교 선생님을 하고자 지원하였다. 남자 선생님은 나 밖에 없었는데 교장 선생님의 부탁으로 남자아이들 세 명이 있는 말괄량이 6학년 반을 맡게 되었다. 군기 좀 바짝 잡아달라는 당부의 말씀과 함께 말이다. 한국학교에서의 경험을 말하기에 앞서, 선생님이 장래희망이었던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지난 길을 짧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본격적으로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는 말을 학교와 주변에서 듣게 되었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말에 친구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때 즐거움을 찾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선생님을 나의 장래희망으로 삼았고, 선생님이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말에 늦게나마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사건이 찾아오는데, 이제 막 생겨서 졸업생이 없는 우리 고등학교에 해군사관학교에서 생도가 방문하여 사관학교에 대해서 홍보를 한 것이다. 여느 순진한 학생들처럼 새하얀 정복과 멋진 모자 아래로 보이는 날카로운 안광, 정제된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을 빼앗겼고, 짧은 방문 후 나누어준 사관학교 홍보물을 부모님께 가져다 드렸다. 어머니는 사관학교 홍보 책자에 여러 번 등장하는 "무료"라는 단어 때문인지, 나의 사관학교 진학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셨고, 아버지를 설득 끝에 나를 사관학교에 보내려고 하셨다.

선생님을 하기 위해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으로 진로를 정했던 나였는데 전쟁이니 군인이니 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의 간곡한 설득 끝에 지원은 해보기로 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2차 시험이라는 관문에서 탈락의 쓴맛을 보았다. 처음으로 본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조차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어려운 점수를 받았기에 이듬해 재수학원에서 부족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주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아시고는 나를 기숙학원에 보내셨다. 사관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관학교 2차 시험을 보러가면 바깥공기를 충분히 쐴 수 있기에 기숙학원의 답답함도 달랠 겸, 다시금 사관학교를 지원했다. 아버지가 육군사관학교 근처, 태릉배밭갈비가 아주 맛집이라고 하셔서 이번엔 해군사관학교가 아닌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2차 시험까지 통과할 수 있었고, 다시 본 수능에서 원하는 점수는 아니었지만 운 좋게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할 수 있는 점수는 받을 수 있었다. 시험을 다시 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선생님이 되어야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관학교를 나와서도 멋진 생도들도 가르칠 수 있고, 지휘관이 되어 병사들도 가르칠 수 있다며 나에게 사관학교 진학을 독려했다. 물론 그 말보단 육군사관학교를 가면 군대를 안 가도 된다는 (거짓)말에 더 혹하긴 했지만, 그렇게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재수학원에서의 생활 때문인지 사관학교의 생활패턴은 적응할 만했다. 물론 빡빡한 학사일정, 군사훈련 등은 여전히 힘든 도전이었지만 어찌어찌 나는 생도과정을 무사히 통과했고 오만촉광이 빛나는 육군소위가 되어 38선 근처의 전방에 배치되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지휘관으로서의 교육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달랐지만, 감사하게도 내 소대원들은 경험이 없었던 내 교육을 잘 들어주었다. 짧은 기간마다 병사들이 군에 입대하고 제대하는 것처럼 나의 보직 또한 길어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바뀌었기에 가르침을 향한 내 갈증이 모두 해소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군에서 민간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위탁교육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모스크바에서 핵물리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3년간 머물며 전공공부 외에도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많은 러시아 사람들을 만나 언어를 교환했다. 그중 몇몇은 오랜 기간 교제하며 각자 친구이며 학생이자 선생님으로서 서로의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직간접적인 여러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한국을 동경하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나 스스로를 한국의 홍보대사로 생각하고 최대한 많은 것들을 알려주려 노력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 군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내가 공부한 핵물리학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적은 분야를 맡고 있었기에 어깨가 무거웠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진 않을까, 내가 만든 자료에 실수는 없었을까하는 걱정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당시 해당 조직에서 관련 학위를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에, 가끔은 높은 분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할 때도 있었고 주한미군의 미군들이 방문하였을 땐 브리핑도 해야 했다. 혹시나 받을 어려운 질문에 대비해서 따로 밤늦게까지 공부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길지 않은 기간은 내게 가르친다는 것은 항상 배워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배움에 목말라하던 중, 운이 좋게도 군이 지원하는 박사과정에 선발되어 미국의 명문대학 중 하나인 퍼듀대학에 올 수 있게 되었다.

추운 겨울 생후 100일 된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온 미국에서의 생활은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한 나에게도 녹록지 않았다.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을 따라가야 했고, 연구실에서는 열심히 사수가 하는 것을 따라서 조교로 일해야 했다. 이듬해 둘째가 태어났고, 내 아이들의 첫 번째 선생님으로써 숟가락의 쥐는 것, 걷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나에게는 가르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어느덧 아이들이 많이 커서 숫자, 알파벳, 한글 등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삐뚤빼뚤 그림인지 글자인지 모를 것들을 적어놓을 때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이제 학교에서도 어느덧 졸업을 준비하고 있어서 종종 조교로 수업을 나가기도 하며 새로 연구실에 들어온 학생들의 멘토로서 연구 지도를 하면서도 배움과 가르침을 병행하고 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인생의 매순간 어딘가에는 있었던 것 같다. 가르침을 멈추는 순간 배움도 같이 멈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가 있는 지금 이곳이 학교이자 교정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런 나에게 퍼듀한인장로교회의 한국학교와의 만남은 매우 특별했다. 나를 따르는 세 명의 6학년 학생들과 함께 한국어와 프로그래밍 언어, 그리고 간단하게나마 인공지능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어색할 줄 알았던 첫 만남이었지만 아이들은 첫 번째 만남부터 나를 허물없이 대해 주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나에게 씌워진 가면들 대신 나를 있는 그대로 대해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선생님으로서의 본분을 다시금 자각하게 되었다.

한국학교 선생님으로써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의 만남으로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조금의 영감이라도 줄 수 있다면 학생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까 고민되었다. 그러던 중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읽었던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님의 "우리는 모두 각자의 별에서 빛난다"라는 책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티비와 조직도를 거꾸로 봄으로써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이야기를 보며, 아이들이 변화무쌍한 미래에 대응하도록 좁은 교실 안이지만 많은 것들을 경험시켜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부터 좋은 선생은 가르치는 직임과 동시에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스스로에 대한 약속으로 한 달에 적어도 책 두권을 읽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내가 읽은 책 중에 알아두면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야기도 나누았다. 그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은 멜 로빈스의 "5초의 법칙"이었다.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물쭈물 동기부여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5,4,3,2,1 카운트를 한 후에 실행에 옮기라는 것이었다. 수업 중에 아이들이 산만할 때도 사용해 보았고, 아이들이 집에 가서 부모님들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무척이나 뿌듯했다.

책의 내용도 함께 나누는 동시에 한 시간 반 정도인 1교시에는 아이들이 지루하지 않게 경제 그리고 심리학 효과들도 함께 공부했다.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친구들이라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이 한국에서 하는 교과서가 어려웠을텐데 한국어 수업도 너무나 잘 따라와 주었다. 2교시에는 프로그래밍과 인공지능에 대해서 공부했다. 블록형으로 코딩을 하여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스크래치라는 사이트에서 함께 좀비슈터 게임을 만들었다. 2022년 말 출시 된 챗GPT가 아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때 우리 반도 이에 질세라 함께 실습을 해보았다. 같이 재미난 질문을 던져보고, 챗GPT와 함께 독후감을 써보고, 파이썬으로 게임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해서, 만들어진 게임을 함께 플레이도 해보았다.

학생들과 함께 한 졸업식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우리반이 준비한 것은 잰말놀이와 게임 시연이었다. 틀린 부분도 있었지만 빠른 박자에 맞추어 1절씩 한국어로 랩을 외웠고, 한 학기 동안 만든 좀비슈터 게임이 어떻게 구동되는지 보여주었는데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 같이 보낸 시간이 더 있었다면 모바일 앱으로 만들어 실제 플레이스토어 등에 출시도 해보았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지금은 새로 맡은 여섯명의 4학년 학생들과 함께 한국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마치 우리 집에서 둘째가 태어났을 때처럼, 한 해가 지나고 학생이 두 배가 되니 내 어깨도 두 배로 무거워짐을 느낀다. 박사과정 마무리를 앞두고 바쁜 일정 핑계로 아이들의 배움이 부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우리 반은 더 넓은 세상을 준비한다. 벌써 반 정도 지난 이번 학기엔 매직아이와 이를 이용한 틀린 그림 찾기로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있다. 앞으로도 나 자신과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해 지금, 그리고 여기가 교정이라는 생각으로 배우고 나누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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